[현장] 최태원의 경고 ”AI 꺾이면 대공황급 충격"… 4가지 해법
최태원 SK그룹 회장 “AI·G2 패권 경쟁에 전통 경제 모형 작동 안 해”
"경제학과 아니신 분, 손 들어보세요."
5일 서울 관악구 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연단에 오른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강연 첫머리에 객석을 향해 물었다. 곳곳에서 손이 올라가자 최 회장은 "원래 경제학부 요청이라 4년 전과 비슷한 자리로 생각했는데 일이 좀 커진 것 같다"며 웃었다. 사회자가 "가장 아름다운 가을 날씨"라고 소개한 이날, 최 회장은 미래 세대 앞에서 한국 경제의 위기와 해법을 풀어놨다.
이날 행사는 서울대학교 경제학부(학부장 이정민)가 마련한 '자유와 시장' 특강으로, 경제학부 재학생 등 450여명이 참석했다. 최 회장이 서울대 경제학부 학생들 앞에 선 것은 2022년 4월 '시장의 변화, 미래의 기업' 특강 이후 약 4년 반 만이다. 최 회장은 1시간 가까이 세계 경제의 변화와 한국 경제의 과제를 짚은 뒤 학생들의 질문에 답했다.
◆ "교과서 시장원리, 더는 작동하지 않는다"
최 회장은 '변화의 속도'로 강연을 열었다. 그는 “30년 넘게 기업을 경영하면서 변하지 않은 적이 한 번도 없었고, 변할 때마다 속도는 항상 더 빨랐다”고 말했다. 20~30년 전 변화의 크기가 3~5였다면 지금은 300~500에 이른다는 것이다. 반면 법과 제도, 학교 같은 시스템은 그만큼 빨리 바뀌지 못하고, 이 간극이 청년 세대의 불안으로 이어진다고 진단했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5일 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학에서 '자유와 시장' 특강을 하고 있다. [사진=더밸류뉴스]
첫 화두는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시장 원리'였다. 최 회장은 수요와 공급 곡선이 만나 가격을 정한다는 전통 모형이 디지털 경제에서는 그대로 작동하지 않는다고 했다. 누가 물건을 사고 누가 만드는지 특정할 수 있게 되면서 익명의 시장 대신 기업과 고객이 일대일 관계를 맺게 됐고, 여기에 AI가 더해지며 변화의 폭이 더 커졌다는 설명이다. 그는 "잘되는 곳만 되고 안 되는 곳은 계속 안 되는 K자형 양극화가 거의 모든 산업에서 나타나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어 '말이 안 되는 돈'의 흐름을 짚었다. 미국 국가부채가 GDP의 124%에 이르러 국방비를 웃도는 이자를 내야 하는 상황이 됐고, AI 인프라 투자는 GDP 대비 3.8% 수준으로 맨해튼 프로젝트나 전력망·고속도로 구축 때를 크게 넘어선다는 것이다. 최 회장은 "이만한 돈을 단시간에 한꺼번에 넣다 보니 반도체 품귀와 GPU 부족, 에너지 부족이 생긴다"며 "이 문제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미·중 패권 경쟁은 "상대가 죽을 때까지 싸우는 싸움"으로 표현했다. 시간이 갈수록 초조해진 미국은 모든 전략을 동원해 중국을 누르려 하고, 중국은 시간을 끌며 버티는 구도라는 것이다. 최 회장은 “WTO 체제에서 전 세계가 하나의 시장일 때 값싸고 좋은 물건을 만들어 수출하던 우리의 발전 모델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며 "어느 한쪽 시장을 포기하도록 강요받는 상황이 곧 몰려올 수 있다"고 경고했다.
AI가 성장을 떠받치는 구조도 위험 요인으로 꼽았다. 최 회장은 미국 경제성장에서 AI의 기여율이 60% 안팎이고 한국도 50%를 넘는다고 설명했다. 지난 6월 ‘3대 메가프로젝트' 국민보고회에서 발표한 2100조원 투자를 두고는 "저도 '이렇게 발표해도 되나' 싶을 만큼 힘들었다"며 "과거엔 200조원만 해도 엄청난 투자였는데 이제 게임의 양상이 완전히 달라졌다"고 털어놨다. 그러면서 “AI가 꺾이는 순간 1930년대 대공황에 버금가는 충격이 올 수도 있다”며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잘 관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 뉴 캐피탈리즘부터 한일 경제연대까지…최태원의 4대 해법
최 회장은 한국 경제의 4가지 해법으로 '뉴 캐피탈리즘', 'AI 네이티브 국가', '한일 경제연대', '성장 인센티브'를 제시했다.
저출산·고령화와 저성장 고착, 부채 증가, 사회 갈등 등 내부 문제에 대해 최 회장은 "여러분이 이미 신문에서 다 보신 얘기"라며 짧게 넘어갔다. 대신 대내외 문제를 함께 놓고 풀어야 한다며 4가지 해법을 제시했다.
첫째는 '뉴 캐피탈리즘(새로운 자본주의)'이다. 기업이 번 돈으로 세금을 내고 정부가 그 재원으로 국방·복지 등 사회 문제를 푸는 기존 구조가 한계에 이르렀다는 진단이다. 정부는 정해진 예산과 법의 테두리 안에서만 움직일 수 있어 빠르게 복잡해지는 사회 문제를 따라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최 회장은 "착한 사람이 착한 일을 하길 기대하는 것만으로는 사회가 나아지지 않는다"며 사회적 가치를 측정해 그만큼 '네거티브 택스' 형태의 인센티브를 주자고 제안했다. 10년간 실험해 본 결과는 "된다"였다고 했다.
둘째는 ‘AI 네이티브 국가'다. 인프라를 깔고 AI를 많이 쓰게 하는 데 그치지 않고 노동과 제도, 대학 등 사회 시스템 자체가 바뀌어야 한다는 의미다. 최 회장은 에너지와 반도체, 데이터센터, 파운데이션 모델, 애플리케이션으로 이어지는 5개 층 가운데 맨 위 애플리케이션을 강조했다. 그는 "우리 실생활 데이터에 맞는 애플리케이션을 얼마나 빨리 만드느냐가 결국 경쟁"이라며 “AI에 성장 모델을 얼마나 빨리 맞추느냐가 나라의 운명을 좌우할 것”이라고 말했다.
셋째는 한일 경제연대다. 한국과 일본 모두 다른 나라와 육로로 이어지지 않은 섬나라 같은 자급형 경제를 꾸려 왔고, 같은 문제를 안고 있다는 것이다. 최 회장은 “GDP 2조달러 규모인 한국이 일본과 함께 6조달러 경제권이 되면 규모는 3배지만 성공했을 때 돌아오는 리턴은 10배쯤 될 것”이라며 "여러분에게 훨씬 많은 기회가 생긴다"고 했다. 두 나라가 함께 안고 있는 저출산·고령화 비용을 낮출 수 있다는 점도 들었다.
넷째는 성장 인센티브다. 최 회장은 "대한민국의 수많은 중소기업은 중소기업을 벗어날 생각이 없다"며 "벗어나는 순간 새로 맞닥뜨리는 규제만 200여가지이고 받던 지원은 거의 다 끊긴다"고 지적했다. 고도성장기에 굳어진 '대기업은 규제, 중소기업은 지원' 프레임을 그대로 두면 아무도 성장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성장한 만큼 지원해 주겠다는 쪽으로 틀을 바꿔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 회장은 "네 가지 중 최소 두 가지라도 제대로 한다면 대한민국의 미래를 그렇게까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라며 "네 가지를 다 한다면 상당히 좋은 나라가 될 수 있다"고 강연을 맺었다.
◆ “AI 쓰는 법보다 설계할 자유” 서울대생 질문에 답한 최태원
질의응답은 학생들에게만 질문을 받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첫 질문은 대학이 AI 이론은 가르치지만 활용 능력은 가르치지 않고, 과제에서 AI를 쓰는 규정도 모호하다는 지적이었다. 최 회장은 “AI를 가르치느냐 쓰느냐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며 "쓰지 말라고 해도 여러분은 알아서 쓸 것"이라고 답했다. 자동차가 처음 나왔을 때 중요한 건 내부 구조가 아니라 자동차로 어디를 가고 어떤 규칙을 만드느냐였다는 비유도 들었다.
최 회장이 꼽은 것은 '설계 능력'이었다. 그는 "졸업하려면 몇 학점을 이수해야 하는지는 알아도 왜 그만큼인지, 누가 정했는지는 아느냐"고 되물었다. 이어 "대한민국은 남의 제도를 모방해 와서 왜 그렇게 만들어졌는지 모른다"며 "이제는 갈아엎고 스스로 설계할 수 있어야 미래의 대한민국이 된다"고 했다. 대학에는 "실패할 수 있더라도 학생들이 설계할 수 있는 자유를 줘야 한다"고 주문했다. 답변 뒤에는 질문 내용이 마침 다음 강연 자료와 겹치자 "짠 거 아니다"라고 해명하기도 했다.
개인과 조직의 이해가 부딪칠 때 어떻게 푸느냐는 질문에는 '벡터'를 꺼냈다. 최 회장은 "사람은 크기와 방향을 가진 벡터"라며 "능력 있는 사람이 아무리 많아도 방향이 제각각이면 조직은 제자리에 머문다"고 말했다. AI는 사람들의 이해관계가 어떻게 다른지 정확히 찾아낼 수 있지만, 설득해 방향을 맞추는 건 사람의 일이라는 것이다. 그는 "갈등을 수습하고 한 방향으로 모을 수 있는 사람이 미래에는 훨씬 가치 있는 일을 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 AX는 세 갈래, 한일 연대는 ‘30년짜리 옵션'
현 시점의 EU 가맹국들. 최태원 회장은 한국과 일본의 경제 연대를 주장하며, EU의 창립을 주도한 독일-프랑스 관계를 예시로 들었다. [이미지=버핏연구소 | AI 생성]
SK그룹의 AI 전환(AX) 전략을 묻는 질문에는 세 갈래 방향을 소개했다. 모든 직원이 각자의 AI 에이전트를 갖고 정보와 일정을 주고받으면 경영진이 조직 전체의 업무를 한눈에 보고 중복된 일을 바로 조정할 수 있다는 게 첫째다. 둘째는 반도체 하나를 만드는 데 거치는 600~700개 공정을 AI로 시뮬레이션해 중간 결과를 확인하는 스마트 공장이다. 셋째는 물류 회사가 AI를 도입하다 물류 AI 솔루션 회사로 탈바꿈하는 것처럼 사업 모델 자체를 바꾸는 방식이다.
한일 협력의 핵심 경쟁력을 묻는 질문에는 유럽연합(EU)의 출발점을 예로 들었다. 앞서 강연에서 최 회장은 "일본과는 역사 문제가 많고 경쟁도 많이 해 와 '이게 제대로 되겠느냐'고 묻는 사람이 많다"고 짚은 바 있다.
이에 대한 답으로 그는 "한국과 일본을 가깝고도 먼 사이라고 하지만, 솔직히 프랑스와 독일보다는 훨씬 나은 관계였다"고 말했다. 독일과 프랑스는 보불전쟁과 두 차례 세계대전을 거치며 양국에서만 수백만명이 목숨을 잃은 앙숙이었다. 그런 두 나라도 2차대전 뒤 "이렇게는 안 되겠다"며 경제 협력에 나섰고, 그 모델을 계속 발전시켜 지금은 27개 나라가 한 시스템 안에 들어와 있다는 것이다.
최 회장은 "한일이 6조달러 경제권을 만들면 세계 4위권이 되고, 다른 나라들이 들어오고 싶어 하는 규칙을 정하는 쪽이 될 수 있다"면서도 "혼자 살 수 있다면 혼자가 가장 깔끔하지만, 혼자만 살겠다는 전략은 너무 고립되고 위험하다"며 연대는 어디까지나 키워 둬야 할 '옵션'이라고 선을 그었다. 그는 “EU도 70년이 걸렸으니 우리도 30년은 걸릴 일”이라며 "내년에 하자는 얘기가 아니다"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