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상장기업의 86%에서 대표이사가 이사회 의장을 겸직하고 있다. 반면 독립이사(종전 사외이사)가 의장을 맡은 기업은 4.2%에 불과하다. 미국 S&P500 기업의 독립이사 의장 비율 42%와 비교하면 10분의 1 수준이다. 조사 대상과 기업 규모가 달라 단순 비교에는 한계가 있지만, 한국 기업지배구조의 구조적 문제를 보여주는 수치임은 분명하다. 경영진을 감독해야 할 이사회를 정작 경영진이 이끌고 있기 때문이다.


2025년 6월 말 기준 코스피·코스닥 상장사 2,531곳을 조사한 한 연구소의 결과를 보면, 대표이사가 이사회 의장을 겸직한 기업은 2,176곳이었다. 독립이사가 의장을 맡은 기업은 107곳뿐이었다. 이사회는 중요한 투자와 인수합병, 계열사 거래, 경영진 평가 등을 심의하고 감독하는 기구다. 이런 이사회가 경영진으로부터 얼마나 독립적으로 운영될 수 있는지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이사회는 경영진의 결정을 추인하기 위해 존재하는 조직이 아니다. 경영진이 올바른 결정을 내리도록 감독하고, 필요하면 제동을 거는 것이 본래 역할이다. 그런데 감독받아야 할 최고경영자가 감독기구의 의장까지 맡는 구조에서는 이해상충을 피하기 어렵다.


이사회 의장은 단순한 회의 진행자가 아니다. 안건 설정, 정보 공유, 토론 분위기, 의사결정 과정 전반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독립이사가 아무리 많아도 중요한 안건이 충분히 논의되지 못하고 경영진에 대한 비판적 의견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다면, 이사회의 독립성은 형식에 그칠 수 있다.


한국 기업지배구조 개혁은 독립이사의 숫자를 늘리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 다음 과제는 이사회 의장을 독립이사에게 맡기는 제도를 확산하는 것이다.


[이영기 칼럼] 이사회 의장부터 바꿔라…독립이사 의장 4.2%의 진실이사회 이미지 [이미지=더밸류뉴스 | AI 생성] ◆ 미국은 독립의장 42%…영국은 CEO와 의장 분리가 원칙


다른 선진국의 기업지배구조는 이미 이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글로벌 경영컨설팅업체 스펜서스튜어트(Spencer Stuart)의 ‘2025 미국 이사회 지수(U.S. Board Index)’에 따르면, S&P500 기업 가운데 최고경영자와 이사회 의장을 분리한 기업은 61%였다. 2015년 48%에서 13%포인트 높아진 수치다.


주목할 점은 독립이사가 의장을 맡는 비율이다. 독립의장 비율은 2015년 29%에서 2025년 42%로 올랐다. 단순히 두 직책을 분리하는 데 그치지 않고, 경영진과 독립적인 인사가 이사회를 이끄는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뜻이다.


영국은 원칙이 더욱 명확하다. 영국 재무보고위원회(FRC)의 ‘2024 기업지배구조 코드(UK Corporate Governance Code)’는 이사회 의장이 선임 당시 독립성을 갖춰야 한다고 규정한다. 최고경영자와 의장의 겸직을 금지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CEO가 같은 회사의 의장으로 자리를 옮기는 것도 제한한다.


물론 영국의 기업지배구조 규범은 법률에 따른 일률적 강제가 아니라 '준수하거나 설명하라(Comply or Explain)'는 원칙에 기반한다. 기업이 규범을 따르지 않을 수는 있지만, 그 이유를 주주에게 투명하게 설명해야 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도 2023년 개정한 ‘G20/OECD 기업지배구조 원칙'에서 최고경영자와 이사회 의장의 분리가 권한의 균형을 확보하고 이사회의 독립적인 의사결정을 강화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평가했다.


이들 사례의 핵심은 분명하다. 경영을 책임지는 사람과 경영을 감독하는 사람의 권한을 분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 SK그룹·LG그룹, 독립의장제 적극 채택


한국에서도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2026년 9월 발표된 또 다른 연구소 조사에 따르면, 전년과 비교가 가능한 주요 대기업 상장사 311곳 중 독립이사가 이사회 의장을 맡은 기업은 2025년 83곳(26.7%)에서 2026년 91곳(29.3%)으로 늘었다. 앞서 언급한 전체 상장사 조사와는 대상이 달라 직접 비교하기는 어렵지만, 주요 대기업을 중심으로 독립의장 체제가 확산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대표적인 곳이 LG그룹과 SK그룹이다. LG그룹은 ㈜LG, LG전자, LG디스플레이, LG이노텍 등 주요 상장 계열사 11곳 모두를 독립이사 의장 체제로 전환했다. SK그룹은 2025년 조사에서 상장 계열사 20곳 중 15곳이 사외이사를 의장으로 선임한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롯데그룹은 상장 계열사 10곳 모두에서 대표이사가 이사회 의장을 겸직하고 있다는 조사 결과가 있다. 다만 롯데그룹 등은 선임사외이사 제도를 운영하는 등 보완장치를 마련하고 있다.


독립이사 의장 체제의 확대는 특정 기업이나 경영진의 능력을 부정하는 문제가 아니다. 기업이 성장하고 사업구조가 복잡해질수록 경영진의 판단을 독립적인 시각에서 검증할 필요성이 커진다는 점에서 접근해야 한다.


최근 한국에서는 상법 개정을 계기로 독립이사와 감사위원의 독립성을 강화하려는 제도 변화가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이사회 구성에서 독립이사 비율을 높이는 것만으로 기업지배구조 개선이 완성되지는 않는다.


2026년 조사에서 주요 대기업 상장사 332곳의 전체 등기임원 중 독립이사 비율은 54.0%였다. 독립이사가 이미 과반을 차지하고 있지만, 비교 가능한 311곳 중 독립이사가 의장을 맡은 비율은 29.3%에 그쳤다. 이사회 구성의 독립성과 운영의 독립성이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바꿔야 할까.


우선 대규모 상장기업을 중심으로 독립이사의 의장 선임을 기업지배구조의 권고 기준으로 정착시킬 필요가 있다. 독립이사를 의장으로 선임하지 않는 기업에 그 이유와 대체 견제장치를 공시하게 하는 방안도 검토할 만하다. 영국의 '준수하거나 설명하라' 제도가 참고가 될 수 있다.


◆ 이사회 독립성, 숫자보다 권한이 중요하다


독립의장에게 실질적인 권한을 부여하는 것도 중요하다. 독립의장은 이사회 안건 편성에 관여하고, 경영진이 참석하지 않는 독립이사 회의를 주재하며, 필요할 경우 외부 전문가의 자문을 요청할 수 있어야 한다. 경영진 성과평가, 승계계획, 대규모 투자, 이해상충 거래에 대해서도 독립적인 검토가 이뤄지도록 해야 한다.


무엇보다 독립이사 선임 과정부터 투명해야 한다. 지배주주나 경영진과 밀접한 관계에 있는 인사를 독립이사로 선임하고 의장이라는 직함만 부여한다면 개혁의 의미는 퇴색할 수밖에 없다. 독립이사의 전문성, 경영진으로부터의 독립성, 이해상충 여부를 엄격하게 검증해야 하는 이유다.


물론 CEO와 이사회 의장직의 분리가 모든 기업에 언제나 최선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창업자 중심 기업이나 급격한 사업 전환을 추진하는 기업에서는 경영의 일관성과 신속한 의사결정이 중요할 수 있다. 독립이사 의장을 선임하더라도 경영에 대한 이해와 전문성이 부족하면 오히려 이사회의 효율성이 떨어질 수도 있다. 따라서 획일적으로 의무화하기보다는 대규모 상장사를 중심으로 독립의장 선임을 원칙으로 유도하되, 예외를 택한 기업에는 충분한 설명책임을 부과하는 접근이 현실적이다.


경영의 효율성을 이유로 이사회의 감독 기능이 약해져서는 안 된다. 경영진에게는 신속하게 판단하고 실행할 권한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 판단이 회사와 전체 주주의 장기적 이익에 부합하는지 검증하는 역할도 반드시 필요하다. 지배주주의 영향력이 강한 한국 기업에서는 이사회가 경영진과 대주주의 이해관계에서 벗어나 독립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구조를 갖추는 일이 특히 중요하다.


기업지배구조의 궁극적인 목표는 경영권을 제약하는 것이 아니다. 잘못된 의사결정의 위험을 낮추고 경영에 대한 신뢰를 높여 기업의 장기적 가치를 끌어올리는 것이다. 독립적인 이사회는 경영진의 발목을 잡는 조직이 아니라, 경영진의 판단을 더욱 정교하게 만드는 조직이어야 한다.


독립이사 의장 비율 4.2%는 단순한 통계가 아니다. 한국 기업이 이사회 개혁에서 풀어야 할 과제가 여전히 크다는 점을 상징한다. 최근 주요 대기업의 독립의장 비율이 29.3%까지 높아진 것은 긍정적이지만, 이런 변화가 전체 상장기업으로 확산되기까지는 갈 길이 멀다.


독립이사를 몇 명 선임했는가보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실제로 얼마나 독립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는가다. 이사회 의장을 누구에게 맡기느냐는 바로 그 질문에 대한 기업의 답이다. 경영은 CEO가 책임지고, 감독은 독립적인 이사회가 책임져야 한다. 이제 한국 기업도 이사회 의장 자리를 경영권의 상징이 아니라 독립적 감독의 상징으로 바꿀 때다.